우즈베크 현지 가이드 '솔레존'은 사업가로서 사마르칸트 문화 유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사마르칸트는 13세기 칭기즈칸이 철저히 파괴하여, 현재의 유적은 14세기 정복자 티무르가 약탈한 재화로 만든 것이다.
우리는 사마르칸트 유적을 설명해 줄 사람으로 '로디라' 양을 문화 유적 해설자를 고용했다. '로디라' 양은 나이가 어려 보이는 외모인데 36세라고 한다. 아이가 세 명이고, 큰딸은 17살 고등학생이라고 해서 놀랐다. 로디라 양에 의하면 현재 우즈베크 여성은 18살에서 22살 사이에 대부분 결혼한다고 한다. 24살 나이에도 미혼이면 오울드(Old) 미스에 속하고, 28살 나이에도 미혼이면 이혼남이나 40세 이상 노총각과 결혼한다고 한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21baba3181ead1.jpg)
우리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빠른 조혼(早婚)이다. 로디나 양은 한국어를 빨리 배워서 한국 관광객 가이드 일이 꿈이라고 한다. 우즈베크에서 '코리아 드림'은 최고의 로망이다. 로디나 양으로부터 여성의 결혼 연령 얘기를 들어보니, 시내에서 만나는 20대 전후 나이 어린 엄마들이 많은 이유를 알 것 같다.
식당에서 대가족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할아버지가 40대 중후반, 50대 초반이다. 로디라 양과 함께 40도 이상 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사마르칸트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한국 사람은 우즈베키스탄의 국민 영웅 '티무르'에 익숙하지 않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70킬로 떨어진 시골에서 태어난 쇠락한 몽골족 귀족의 아들이다. 원나라와 몽골제국이 쇠락해 가기 시작하는 1336년 태어나서 중앙아시아, 이란, 중동지역, 남러시아 등 마지막으로 유목 세계를 정복한 유목민 영웅이다. 명나라를 침략하러 가다가 1405년 병사했다. 우즈벡인이 자랑하는 국민 영웅이다.
사마르칸트는 정복자 티무르가 정복지에서 데려온 장인, 예술가, 건축가들을 동원해서 재정적 후원으로 멋진 건축물을 많이 만들었다. 티무르는 준 문맹(文盲)임에도 학자들을 좋아해서 유명한 학자들을 불러서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자손인 후세 왕들은 예술과 문학 후원에 기여를 많이 했고, 티무르의 손자 왕은 유명한 천문학자로 레기스탄 광장에 마드라사(대학)를 세워서 학문을 후원했다.
티무르는 소련연방 시대는 인민을 착취하는 사람으로 폄하되다가 1991년 우즈베크 독립 후 영웅으로 다시 숭배되고 있다. 레닌 동상 자리를 허물고 티무르 동상을 많이 건립했다. 우즈베크 신혼부부들이 공원의 티무르 동상 앞에서 결혼식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자주 본다. 티무르 영묘는 청록색 타일로 멋있게 지었다. '청색'은 우주의 중심인 '하늘'과 해가 뜨는 '동쪽'을 상징한다. 종교적 염원이 있는 색이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3a5da9bb2811f1.jpg)
여성은 티무르의 묘지 입장 시 치마를 입어야 한다. 아내는 현관에서 앞치마를 빌려서 입는다. 남성은 반바지 차림도 허용되고 있다. 이슬람교 사회는 여성의 권리가 차별받고 있음을 느낀다. 티무르 묘에는 티무르보다 1년 먼저 죽은 사랑하는 손자, 티무르의 두 스승, 티무르 등 5명의 관이 있다. 묘지 건설은 일찍 죽은 장손자의 묘지로 시작했는데, 티무르가 1405년 죽게 되자 손자 묘와 합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 '검은색 관'이 티무르 묘지이다.
양옆에 있는 두 개의 스승의 관이 티무르 관보다 더 크게 만들었는데 스승에 대한 존경에 대한 표시라고 한다. 잔인한 유목사회 정복자 티무르가 스승을 깍듯하게 모신 점이 국가의 통치자로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화려한 타일 장식의 티무르 묘지는 사마르칸트의 중요한 관광지의 하나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장소인 묘지는 음산한 느낌은 전혀 없다. 죽은 자의 궁전에 찾아온 살아있는 자들의 즐거운 소풍 장소로 흥겨운 분위기이다.
전설에 의하면 티무르가 자기 묘지를 파손하는 사람에 큰 재앙을 내리겠다는 저주를 했다고 한다. 러시아 과학자가 1941년 티무르의 관을 열어서 진짜 티무르 인지 여부를 확인했다. 티무르는 청년 시절 양 도둑질 하다가 오른발을 다쳐서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다리뼈 확인 결과 오른발 절름발이가 맞음을 확인했다. 티무르의 저주 때문인지 몰라도 묘지 개봉 1년 후 1942년 스탈린이 믿었던 동맹국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2차세계대전 독, 소 전쟁이 발생했다.
'레기스탄 광장' 주변에 우아한 색깔의 타일로 만든 세 개의 마드라사(대학) 건물이 웅장하다. 마드라사는 수십 개의 교실과 기숙사가 위 아래층 붙어 있는 왕립대학 건물이다. 지금 1층의 모든 교실은 기념품 가게, 2층의 학생 기숙사 자리는 창고로 쓰이고 있다. 아내는 마드라사 건물의 기념품 가게에서 현지 장인이 만든 작은 찻잔과 가죽에 그린 그림 한 점을 40달러를 주고 샀다.
오른쪽 마드라사 건물 벽에 불교를 상징하는 만(卍)자 문양, 호랑이 등에 탄 부처 얼굴, 연꽃 모양 장식이 있다. 건축가가 종교 간 화합의 목적으로 설치했다고 한다. 이슬람교는 751년 탈라스전투에서 아랍군 승리 후 포교가 왕성하게 시작해서 10세기에는 중앙아시아 지역은 거의 이슬람화가 완성되었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1559664525ba45.jpg)
8세기 이전은 사마르칸트 등 중앙아시아 지역은 모든 종교가 자유롭게 허용되었다. 조로아스터교, 불교, 마니교, 기독교, 유대교 등 세계의 종교 백화점이었다. 서기 630년 전후 당나라 현장 스님이 천축으로 가던 시대에는 불교 사원과 승려가 많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그드 상인은 서방의 종교를 중국으로 가져온 종교 전달자 역할을 했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엄청난 규모로 14세기 건축 당시 최대 만 명이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티무르의 부인인 '비비하눔'은 티무르보다 6살 연상의 부인으로 칭기즈칸 손녀 중 하나이다. 티무르는 몽골족 작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티무르가 유목사회의 정복자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칸(왕)은 칭기즈칸 후손을 명목상 세우고, 본인은 칸에 오르지 아니했다.
당시에도 칭기즈칸 혈족은 '황금가문' 으로 칸(왕)은 칭기즈칸의 피를 받은 사람이 했다. 중앙아시아 일부 지역의 유전자 검사 결과 전체 주민의 약 17%가 칭기즈칸 후손의 피를 갖고 있다고 한다. 유목사회의 실력자는 수많은 처첩을 얻어서 강력한 혈연집단을 형성했다. 티무르는 아미르(영주, 제후) 신분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티무르가 칭기즈칸의 손녀인 '비비하눔'과의 결혼은 티무르의 정통성 확보에 기여했다고 한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손녀인 연상의 비비하눔을 50대 후반 늦은 나이에 부인으로 맞이하고, 고귀한 집안과의 결혼에 매우 명예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비하눔 모스크'는 건설 과정에 건축가와 비비하눔의 애절한 로맨스 때문에 유명하다. 티무르가 원정을 가면서 부인인 비비하눔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 공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런데 모스크 건축가가 비비하눔을 사모해서 공사를 지연 지켰다. 건축가는 비비하눔에게 자기에게 키스를 해 주면 모스크 완공을 빨리하겠다고 제안한다. 티무르가 귀환했을 때 키스 소문을 듣고 건축가는 사형에 처하고, 비비하눔도 자살하도록 강제했다는 전설이다. 이런 전설 때문에 사원의 명칭을 '비비하눔 모스크'로 부르고 있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eaa26535c4735c.jpg)
비비하눔은 실제는 티무르가 병사 후 자살했다고 한다. 비비하눔과 비비하눔 어머니 묘지는 비비하눔 모스크 바로 근처에 있다. 거대한 모스크 건물은 신축 당시부터 건축 설계를 잘못하여 현재도 계속 보강 공사 중이다. 문화 유적 해설자 '로디나' 양은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농담한다. 목소리 울림으로 건물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겁을 주면서.
'샤히힌다' 공동묘지는 티무르의 후궁, 딸, 귀족이나 장군의 부인들 묘지이다. 당시 장례 풍속은 여자는 남편과 합장을 못 했다. 왕비, 후궁, 왕족 여성을 위한 묘지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로서 유네스코 세계 유적이다. 청색, 하늘색, 감청색 등 아름다운 타일로 만든 수십 개의 묘지가 멋진 예술품이다. 묘지는 언덕 위에 있다.
아내는 40도가 넘는 무더위에 지쳐 묘지에 올라가기 싫다고 해서 아름다운 묘지 건물을 못 봤다. 묘지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 있다. 묘지의 계단 숫자를 정확하게 세우면서 올라가야 추후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가이드 '로디아' 양이 말해서 가파른 계단을 몇 개인지 마음속으로 세면서 올라갔더니 덜 힘들었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7f4a8f0d956a83.jpg)
세계 7대 불가사의 유적으로 불리는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묘'는 몽골족인 티무로의 자손이 세운 왕비의 묘이다. '샤히힌다' 묘지를 보면서 인도 '타지마할 묘'는 사마르칸트에 있는 몽골족 조상의 묘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인도 무굴제국의 건국자는 티무르의 고손자이다. 티무르 고손자 '바브르'는 우즈베크의 권력 쟁탈전에서 패배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아프가니스탄에 왕국을 세웠다. 이후 바브르의 자손은 북부 인도를 정복하고 인도에 무굴제국을 건설하였다.
세계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독재자가 사후(死後) 궁전으로 만든 묘지가 현대의 후손에게 관광자원으로 돈을 벌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상 많은 독재자는 죽은 다음에도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대규모 묘지 공사를 했다. 가난한 백성은 묘지 건설 공사에 수많은 피와 땀을 흘렸다. 서안의 진시황제 묘지, 사마르칸
트의 티무르 묘지, 인도의 타지마할 묘지, 스페인 프랑코 총통 묘지 등은 인류의 문화유산 또는 관광자원으로 후손을 먹여 살리고 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묘지, 천안문의 모택동 묘지, 베트남의 호치민 묘지,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묘지는 성역(聖域)화되어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인민의 숭배 대상이다.
티무르가 정복지에서 약탈한 재화로 건설한 사마르칸트의 관광 유적은 티무르 사후 700년 후 우즈벡인을 먹여 살리고 있다. 우즈벡인들이 티무르를 국부(國父)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우리는 8월 초 무더위 사막성 기후 아래서 하루 종일 사마르칸트 유적을 둘러보았다. 가끔은 나무 그늘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며 쉬기도 했다. 무더위 여름에 사마르칸트의 여러 곳을 관광하는 것은 힘들다. 점심은 '오쉬'라는 우즈베크의 볶음밥을 먹었는데 우리 입맛에 맞는다. 토마토, 양파채, 신선한 샐러드가 많이 들어간 볶음밥 요리이다.
저녁은 '식후경'이라는 사마르칸트의 한식당에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맛있는 식사를 했다. 사마르칸트에 한국식당이 많다. L 실장, O 사장은 양고기 음식을 안 좋아해서 침울해하다가 한국식당의 김치찌개를 먹고 생기가 돈다. 우리는 중앙아시아의 고대 실크로드 중심도시인 사마르칸트에서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일은 실크로드 중심도시의 하나인 '부하라'로 떠날 예정이다.
![티무로 묘지 앞. [사진=윤영선]](https://image.inews24.com/v1/9214052e0a4af4.jpg)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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