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균성 기자] “1997년 외환위기 때처럼 정부가 직접 메스를 들어야 합니다. 업계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이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업체별 이해관계가 엇갈려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어요. 기업 사이에 큰 덩어리를 주고받는 빅딜(big deal) 만이 지금으로선 유일한 해법이에요. 그런데 이해가 엇갈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으니, 정부가 나서야만 하는 거죠.”
석유화학 업계 한 임원의 말이다. 처음엔 듣는 귀를 의심했다. 기업의 경우 정부의 간섭을 싫어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듣다 보니 진심이었다. 단지 간섭 정도가 아니라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엄청난 대수술을 집도(執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골자였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이 위기라는 기사를 숱하게 접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처음이었다. 벼랑 끝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석유화학 업계는 사실 이미 구조조정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울산산단에서는 효성화학이 TPA 공장과 PDH 공장 한 곳의 가동을 중단했다. 롯데케미칼은 두 곳의 PET와 PIA 공장을 멈춰 세웠다. 태광산업, SK지오센트릭, 한국카프로락탐 등도 가동을 중단했다. 여수산단도 비슷하다. 여천NCC가 에틸렌 3공장을 세웠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도 각각 스티렌모노머(SM) 공장 등 일부 라인을 정지시켰다.
문제는 일시 가동 중단으로 위기를 견디기 힘들다는 데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 위기는 일시적인 경기 침체 문제가 아니다. 공급과잉과 원가 경쟁력 약화라는 구조적 원인 때문이다. 한국 석유화학 제품의 최대 수입처였던 중국이 원가 경쟁력에서 앞서는 최대 경쟁국으로 돌변했다. 막대한 오일 머니로 무장한 중동 기업들은 원유를 직접 생산하며 이를 바탕으로 석유화학 사업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중국과 중동 기업에 원가 경쟁력으로 맞설 수 없다는 뜻이다. 실적이 말해주고 있다. 2020년에만 해도 수 천 억 원에서 조 단위 영업이익을 기록하던 기업들이 지난해에는 줄줄이 적자를 기록했다. 롯데케미칼(-8941억원)을 필두로 여천NCC(-1503억원) LG화학(-1358억원) 한화솔루션(-1213억원) 효성화학(-1705억원) 등이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더 커질 수 있다는 게 더 문제다.
이해욱 DL그룹 회장이 했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부도 위기에 처한 여천NCC와 관련해 “자생 가능성이 없고, 워크아웃 신청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답이 없는 회사에 무작정 돈을 꽂아 넣을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천NCC는 DL그룹과 한화그룹이 지분을 절반씩 소유한 회사이다.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소리로 들린다. 그러면서도 ‘오죽했으면 그랬으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업계 임원 발언은 이 회장 말을 염두에 두고 했던 건 아니다. 여천NCC의 생존 가능성 및 활로를 놓고 DL과 한화가 갈등을 보이기 한참 전에 한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이른 예측이었다고 봐야 한다. 국내 석유화학 업계 가운데 현재 여천NCC가 가장 약한 고리로 불거져 그 예측이 적중했을 따름이다. 여천NCC는 시작에 불과할 뿐이고 추후 있을 또 다른 구조조정에도 얼마든지 등장할 이야기다.
기업의 요구에도 정부로서는 스스로 메스를 들기가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식이요법으로 체질 개선이 가능할지,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순간에 마지막 메스를 들어야 할지,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메스를 들었을 때는 무엇보다 큰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 1997년처럼 확연하게 대기업들이 줄지어 무너질 때와 분명 다르다. 그때는 그것 말고는 진짜 방법이 없지 않았겠나.
1997년 외환위기보다 어쩌면 지금이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때 한국 경제는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였다고 할 수 있다. 폭음이든 과로든 일시적인 과욕이 병의 원인이었다. 증상이 확연하고 환부도 또렷했다. 집도의 결과도 예측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한국 경제는 청년기가 아니라 노년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증세에 따라 과감해야 할 필요도 있지만 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의 약진과 미국의 막무가내 통상질서 재편 정책에 수출 중심의 한국 제조업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중에서 가장 약한 고리가 석유화학 산업이다. 거국적인 지혜가 필요하지만 누구도 정확한 답은 알지 못 한다. 분명한 것 하나는 기업 스스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어보인다는 점이다. 한때 한국 수출 중심지였던 울산과 여수와 대산이 시들고 있다. 굴뚝 연기가 사라지면 사람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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