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18세기 프랑스 작가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1782)를 ‘스캔들’이라는 사극으로 또 한번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기대감이 있었다. 정지우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해피엔드’와 ‘은교’를 만든 정지우 감독의 작품은 수위가 높아도 인간의 속성을 잘 보여주기에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8부작 시리즈인 퓨전 로맨스 사극 ‘스캔들’은 역시 감각적인 정지우 감독의 연출에 힘입어, 예쁘게 영상화가 이뤄졌다. 시청자에 따라서는 지루한 국면도 있었다는 반응도 있지만, 절묘한 우리 역사 구조로 만들어 의미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창출해낸 점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북촌은 요즘 ‘성수동 거리’나 ‘서순라길’ 같은 유행의 거리처럼 유행의 ‘핫플’로 만들어 관심을 가지게 했다. 임금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북촌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모여살았던 공간으로 구한말, 일제강점기까지도 권력을 놓지 않은 노론들이 많이 살았다.
당시 이름 있는 양반가의 도령과 규수들이라면 다 모인다는 북촌을 욕망을 숨긴 말 많은 동네(공간)로 설정하면서, 한옥과 의상, K-골목, K-정원 등의 시각화를 통해 조선의 미(美)를 구축했다. 지창욱의 소품인 자명종과 색안경도 등장하고,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며, 뽕나무를 먹는 누에를 치고 실을 뽑아 옷을 만들어 입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극 전체를 판소리 마당처럼 구성한 구조와 조선시대 민화를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연출도 차별화에 기여했다. 원작에도 있는 형식이기는 하지만, 조씨부인이 그리움을 담은 연서 등 하고싶은 말을 담아 계속 편지를 쓰는데, 이 또한 느낌이 좋다. K-콘텐츠의 세밀하고도 새로운 모습이다. 요즘 카페를 열어보려고 하는 창업자에게 힌트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대사가 절제돼 있는 주인공 조씨부인(손예진)은 여러 공간(레이어)을 거쳐야 도달하는 안채에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혹시 음탕한 생각을 하지는 않을까 하고 마음껏 상상해본다. 그는 남자를 가스라이팅하는 양반가 여성인가?
‘스캔들’은 욕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조선 시대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대부 여인 ‘조씨부인’(손예진)이 자신만을 좋아하는 사촌동생이자 타고난 연애꾼 ‘조원’(지창욱)과 벌이는 발칙하고도 위험한 사랑 내기, 그리고 그 내기에 얽힌 청상과부 ‘희연’(나나)의 이야기다.
18세기말 프랑스 소설인 원작인 ‘위험한 관계’는 인간의 욕망과 위선을 다룬 작품이다. 프랑스대혁명 발발 직전 프랑스 귀족사교계의 도덕과 풍속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원작인 서유럽 프랑스 파리의 이야기는 동시대 아시아의 조선으로 옮겨온다. 조선의 사회적 구조에 맞게 각색되면서 유교적 규범과 위선을 갈등 동력으로 만들었다. 특히 조씨와 희연의 관계는 원작에 없는 얘기를 추가해 만든 것이다.
극중에는 화성 축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원작과 동시대인 조선 정조때다. 극중 왕(정조)은 조원(지창욱)을 화성 축조와 관련해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한다. 실제 정조는 24년간 재위하고 1800년 6월 28일에 승하했다. 이 때부터 천주교인들이 포함된 남인들은 탄압과 수난 시대를 맞는다.(1801년 순조 1년 신유박해) 정약용은 형 한 명을 잃고 무려 18년간 강진 유배 생활을 했다.

“작품의 배경은 군주제지만 신분제가 해체되어 가면서 새로운 질서와 구조를 만들어가는 근대의 맹아기다. 왕은 꼼꼼하게 이를 데 없는 사람이 모델이다. 1782년에 원작이 발간됐다. 그 시기에는 각기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모두가 묶여있다. 특히 서열이 있는 여성 캐릭터들, 정경부인(강지은)부터 소옥(신윤하), 은실이(김지안)까지 디자인했다. 정조가 왕으로 있을 때는 천주교 박해가 심하지 않았다. 그것을 베이스로 해 이야기와 캐릭터를 만들었다. 정조가 여러 채널로 화성 축조 정보를 보고받고 있었다.”(정지우 감독)
‘스캔들’에서는 나나(희연) 캐릭터를 절묘하게 빌드업한다. 희연은 좌의정 집안 아들과 혼인을 올리기도 전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상태에서 남편을 잃는다. 시부모인 좌의정과 정경부인은 나나에게 전통적인 정절을 강요한다. 하지만 감독은 희연을 죽이지 않고 살린다. 희연이 조원을 만났기 때문이다. 죽었다고 소문난 희연은 은밀히 천주학 모임에 다닌다. 천주교는 자결을 죄악시한다.
“희연은 원작에서 죽는데, 죽으면 안된다. 시대의 중력과 압력으로라면 나나는 죽는 게 마땅하다. 그녀에게 변화의 시작은 조원이다. 사랑에 죽고 사는 캐릭터다. 천주학도 생명에 대한 이야기라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얼굴도 모르는 남편 환영에서 눈물 짓는 그녀의 상태가 출발 지점이다. 나중에 조원과의 사랑이 장난이었고 내기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관심있게 봐달라. 하지만 고민은 남는다. 순종적, 전통적,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을 어설프게 사용하면 현재의 논쟁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정지우 감독)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글과 그림에 재능이 있는 조씨 부인은 재주를 펼칠 기회가 제한적이어서 현실과 타협하며 사대부 부인으로 살아간다. 조원과의 관계에서 좌절을 겪고 큰 결단을 하는데, 관계와 사랑을 걸고 게임을 하는 대범함, 아니 사랑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오만함을 지녔다. 손예진은 그런 인물을 섬세한 연기로 캐릭터를 살려낸다.
정 감독은 “조씨부인을 맡은 손예진의 순정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의 마음 둘 곳을 잃은 관객이 있을 것이라는 인지부조화”를 언급했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이미지의 배우 손예진이 경계를 어떻게 허물지에 대한 고민을 통해 앞으로 확장성에 도움이 된 작품이라는 얘기다.
조씨부인은 조원에게 “저랑 같이 떠나자는 말을 기다렸습니다. 아우님이 그린 우리 앞날을 듣고싶습니다. 세상 진귀한 것들이 다 모인다는 연경(燕京. 베이징)은 어떨까요?”라고 말한다. 대감집 부인이 남편 아닌 남자와 사랑의 도피행각을 한다고? 이쯤 되면 조씨부인은 꽤 파격적인 캐릭터다.
이어 정지우 감독은 “손예진은 드라마 전체를 책임지는 슈퍼히어로였다. 어려운 조씨부인 캐릭터도 잘 해주었다”고 말했다.

다정한 느낌에 유머까지 한 스푼 더해준 ‘조원’ 역의 지창욱 연기도 훌륭했다. 나나는 전통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난 캐릭터인데, 비주얼이 조금 더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연초방을 운영하는 ‘분희’ 역의 한선화는 기대를 훌쩍 넘겨 무르익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신분 상승을 위해 딸 소옥을 북촌 유대감집 소실로 들인 분희는 색(色)을 즐기던 시절 만난 조원을 잊지 못해 펼치는 연기가 감칠 맛이 난다. 한바탕 잘 놀고 간다. 한선화는 분희 캐릭터 뿐만 아니라, 극을 재밌게 만들어줬다.
정 감독은 “한선화의 연기는 짝사랑하는 데에서 매력이 있다. 독특하고, 자존심이 있지만 부끄러움을 모른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데, 연기가 천박하지 않다”고 평했다.
일부 배우들이 전라에 가까운 노출을 펼치는 데 대해서 정 감독은 “신인에게는 미리 노출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해 동의를 구했다. 소속사와 가족과도 상의해보라고 했다”면서 “지창욱과 나나의 러브신도 두 사람은 고민이 아니었다. 감정이 문제였다. 인물(캐릭터)이 문제지, 러브신은 문제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지창욱은 죄책감에 흔들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지우 감독은 “옛날 사람이라 해서, 신분이 낮다고 해서 어리석지 않다.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면서 “'열녀문'도 시대의 중력이 작동한 거다. ‘너 죽어야 돼’ 하는 압력이 있었다. 지금은 안 그러고 있나? 내가 시대극을 만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런 판단이 당시는 지혜로운 듯 하지만, 100년 후에도 유효할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약용의 기록에도 '열녀문'으로 자결하는 것에 대한 의로움은 알겠으나, 과도한 면이 있다는 글이 나온다. 이런 근대 맹아기에 ‘스캔들’ 인물들의 자기주도성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걸 판소리 한마당 조씨부인전이 되길 바랬다”고 했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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