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김병수 기자]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했다. 정부가 주도했다. 외환 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대한민국이다. 채권자 IMF의 구조조정 요구를 거스를 순 없었다.
이헌재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던 건 다행이다. 경쟁 관계인 두 대형 은행의 합병은 난제였다. 금융감독위원장 이헌재는 압박과 회유로 은행 산업 구조조정의 큰 물줄기를 잘 컨트롤했다.
일본도 상황이 나빴다. 1980년대 거품경제가 붕괴했다. 1992년께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진 경제 불황. 잃어버린 10년이다. 일본도 경제 회생을 위해 은행 산업 구조조정에 나섰다. 이때 메가뱅크라는 전략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일본은 1997년 은행 경쟁력 강화를 위해 독점금지법을 개정했다. 금융지주회사 설립 길을 열고, 은행을 합병해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메가뱅크다. 역시 정부가 주도했다.
신칸센 같은 속도전이 이어졌다. 신칸센은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 시스템이다.
1996년 4월, 미쓰비시은행과 도쿄은행을 합쳐 도쿄미쓰비시은행이 됐다. 2001년엔 미쓰비시신탁은행과 일본신탁은행을 합병해 미쓰비시도쿄금융그룹으로 재탄생했다. 멈추지 않았다. 2001년에 산화은행과 도카이은행을 합병해 UFC은행이 생겼는데, 2005년에 다시 합병해 미쓰비시UFC금융그룹을 만들었다.
현재 일본에서 제일 큰 금융그룹이 미쓰비시UFG파이낸셜그룹(MUFG)다.
다이이치간교은행·후지은행·닛폰코교은행도 1999년 8월에 합병했다. 2002년에 미즈호금융그룹이 됐다. 2001년 4월엔 미쓰이금융그룹의 사쿠라은행과 스미토모그룹의 스미토모은행을 합쳤다. 스미토모미쓰이금융그룹(SMBC)이다.
![우리금융그룹 슬로건 [사진=홈페이지]](https://image.inews24.com/v1/c12a723fb5ddb1.jpg)
우리나라와 일본의 금융산업 대형화는 비슷한 양상으로 흘렀다. 잃어버린 10년을 거치면서 일본은 은행의 경쟁력 약화를 걱정했다. 산업으로 흘러야 할 돈줄이 마르는 것을 문제로 인식했다. 이후에도 은행 산업은 10여 년 고전했다. 그러나 선제적으로 추진한 일본 은행 산업의 대형화는 점차 기력을 회복했다.
우리나라도 은행 대형화의 물꼬를 텄다. 외환 위기에 따른 금융산업 구조조정이라는 것이 일본과 달랐다. 상업·한일은행은 대기업 여신이 많았던 탓에 가장 큰 난제로 꼽혔다. 부실 은행을 한데 모아 정부가 먼저 지원하자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저성장의 해법으로 금융산업을 대형화하고 기업에 자금을 댄다는 큰 흐름을 선택했다. 우리나라는 부실 은행을 파산시킬 건지, 아닌지를 먼저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대형화의 길을 걸었다.
실제로 '상업+한일'+평화은행의 합병 과정은 일본의 메가뱅크 전략과 유사하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일본 은행들의 자본을 늘리기 위해 투입한 공적자금이 12조 3869억엔에 달했다.
차이가 있다면 자본 투입 방식이다. 일본은 공적자금을 모두 우선주로 투입했다. 은행의 자본은 보강하되 상업은행의 경영 자율권은 해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자발적인 대형화다.
당시엔, 이 차이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제대로 가늠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우리나라도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하면 주가가 오를 것이니, 원금을 회수해 정상 은행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꿨다.
그러나 우린 일본과는 꽤 다른 길로 빠져들었다. 일본은 공적자금을 투입한 후 대체로 10여 년 만에 정상화의 길로 들어섰다.
지난해 3월 14일 예금보험공사는 우리금융의 잔여 지분 1.24%를 매각해 민영화를 최종 완성했다고 밝혔다. 누적 회수금은 13조 163억원. 회수율은 102%다. 무려 24년 3개월 만이다.
[썰] '우리에 갇힌 WooRi' 싣는 순서
①일본 따라 걷기 대한민국의 금융 대형화
②우리은행 민영화는 성공한 것일까?
③금융위원장 후 6년 만의 우리금융 회장, 임종룡
④KB·신한·하나와 너무나 다른 길
⑤오너십만으론 이미 글러 버린 우리은행(끝)
/김병수 기자(bskim@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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