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주요 그룹사들이 '코로나19' 여파와 미중 무역분쟁 등 여러 변수로 위기감이 높아지자 '적과의 동침'으로 돌파구 마련에 나섰다. 선대 회장 간 법적 분쟁까지 벌였던 과거와 상당히 달라진 모습이다.
7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현대차, LG, SK 등 주요 그룹사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로봇, 인공지능, 전기차 배터리 등 신기술 분야 사업 확대를 위해 힘을 모으고 있다.
특히 '미래차'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은 재계 총수 중 가장 적극적으로 경쟁사들과 협력에 나서 주목 받고 있다.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연이어 만난 것이 대표적이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5월 13일 삼성SDI 천안사업장에서 이 부회장을, 6월 22일에는 LG화학 사업장에서 구 회장을, 지난달 7일에는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장에서 최 회장을 만나 차세대 전기차 배터리 기술 및 미래 신기술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지난달 21일에도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에서 이 부회장과 또 다시 만나 미래 자동차와 모빌리티 분야에서 서로 협력키로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전기차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 수석부회장은 올 초 '2025전략'을 통해 전기차 차종을 2025년에 23개로 확대할 것이란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정 수석부회장을 주축으로 국내 4대 그룹 총수가 연이어 동맹을 맺으면서 'K-배터리 어벤저스'가 완성됐다"며 "전기차 전성시대를 앞두고 주요 그룹들이 머리를 맞대게 된 만큼 향후 국내 전기차 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전기차 시장에 공들이는 것은 시장 성장성 때문이다. 업계에선 중국과 유럽의 전기차 시장이 정부의 부양책에 힘입어 계속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쏟아지고 있는 상태다. 실제로 유럽은 최근 코로나19 이후 경기 부양책의 일환으로 전기차 시장 지원 정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2030년부터 전 세계 각지에서 내연기관차가 점진적으로 퇴출되기 시작할 것"이라며 "새롭게 열리는 전기차 시장에서 점유율 경쟁은 완성차 업체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그린뉴딜' 등 코로나 이후 전기차 산업을 강화하는 정책이 나오고 있어 전기차 시장의 성장성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며 "전기차 경쟁력을 높이려면 우수한 품질의 배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로, 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 LG, SK와 현대차가 협력하는 것은 서로 윈윈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화학 분야에서 경쟁 관계인 롯데와 한화는 지난 6월 합성섬유와 페트병의 중간 원료인 PTA(고순도 테레프탈산) 공급과 관련한 업무 협약을 체결하며 동맹을 맺었다. 이에 따라 롯데케미칼은 지난달부터 한화종합화학으로부터 연간 45만t 규모의 PTA 제품을 공급받고 있다. 이에 따라 롯데케미칼은 페트병·도료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PIA(고순도 이소프탈산)에, 한화종합화학은 PTA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임병연 롯데케미칼 기초소재사업 대표는 "급격한 산업 환경 변화에서 경쟁 관계도 언제든 협력 관계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지난해 초 로봇 사업 강화를 위해 네이버 연구개발 자회사인 네이버랩스와 손잡았다. 현재 CEO 직속기구로 '로봇사업센터'를 신설하고 다양한 로봇을 개발해 네이버의 'xDM'을 적용하는 로봇 관련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xDM'은 네이버가 자체 개발한 고정밀 위치 이동 통합기술 플랫폼이다. LG전자는 이를 활용해 가정용 로봇, 안내 로봇, 웨어러블 로봇, 청소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노진서 LG전자 로봇사업센터장 전무는 "LG전자가 로봇을 개발하며 축적해온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의 핵심 기술을 네이버랩스 강점인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융합시켜 고객들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는 로봇을 개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SK텔레콤은 지난달 말 카카오와 3천억 원 규모의 지분 맞교환을 통해 동맹을 맺었다. 이를 통해 SK텔레콤은 카카오 지분 2.5%를, 카카오는 SK텔레콤 지분 1.6%를 보유하게 됐다. SK텔레콤은 '카카오톡' 때문에 문자 메시지 매출에 타격을 입으며 카카오와 한 때 앙숙 관계이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이들이 협력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은 글로벌 플랫폼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 때문"이라며 "SK텔레콤의 가입자와 카카오의 트래픽이 합쳐지면 향후 AI, 모빌리티, 자율주행 등 중장기 신사업에서 다양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자동차그룹 광고회사 이노션도 지난해 5월 롯데그룹 영화 제작·배급사인 롯데컬처웍스와 신사업 발굴과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응을 위해 주식을 맞교환했다. 이노션 최대주주인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장녀 정성이 고문의 지분 10.3%를 롯데컬처웍스에 넘기는 대신, 롯데컬처웍스는 신주 13.6%를 발행해 정 고문에게 배정했다. 현대차 오너 일가가 자신의 지분을 롯데그룹 계열사에 넘기고, 롯데도 현대차 오너 일가에 계열사 지분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재계에선 이례적인 협력 사례로 평가했다.
GS칼텍스는 지난해 12월 롯데그룹 렌터카 회사인 롯데렌탈의 자회사 그린카에 350억원을 투자, 지분 10%를 확보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카셰어링 등 모빌리티 분야에서 신성장동력을 발굴하기 위한 일환으로, 향후 카셰어링 시장의 이해도를 높이고 주유소, 주차장 인프라를 접목해 시너지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진행됐다.
재계 관계자는 "기업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익을 높이고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최근 경쟁사들과 잇따라 손을 잡고 있다"며 "특히 오너 3~4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명분보다 실용성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는 주로 대기업 간 동맹을 맺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대기업과 우량 기술을 갖춘 중소기업 간 협력 사례가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협력 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한쪽만의 희생을 요구하면 제휴가 깨질 우려도 큰 만큼, 경제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점을 고려해 초심을 유지하며 관계를 이어가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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