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국정농단' 사태로 수감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물산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부정회계 의혹에 대한 '옥중 재판'이 재개됐다.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2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고 재수감된 지 3개월여 만이다.
반도체 패권 전쟁이 가속화되며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이 부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지만, 합병 및 부정회계에 따른 경영권 불법 승계 관련 재판을 둘러싼 또 다른 법정 공방이 장기간 펼쳐질 것으로 보이면서 삼성의 '잃어버린 10년'은 점차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부장 박정제·박사랑·권성수)는 22일 오전 10시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 등 삼성그룹 관계자 11명의 1회 공판을 진행한다. 두 차례의 공판 준비 기일 이후 열리는 첫 정식 재판으로, 최근 충수염 수술을 받고 퇴원한 이 부회장은 이날 법정에 출석해야 한다. 공판 준비 기일과 달리 공판 기일은 피고인 출석 의무가 있다.
이 재판은 지난해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이와 관련된 수사에 대해 '불기소' 권고를 내렸지만, 검찰이 결국 기소를 결정해 진행됐다. '국정농단' 사건과는 별개로, 삼성그룹 내부자들이 저지른 경영 비리 혐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정농단 사건은 이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최서원(옛 이름 최순실) 씨 사이 있었던 뇌물 혐의와 관련된 것이다.
검찰은 지난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불법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회장이 삼성전자 지분을 확보할 목적으로 옛 삼성물산 주가를 억지로 끌어내리고 제일모직 가치는 부풀렸다는 주장이다. 또 자회사였던 삼성바이오에피스와 관련해 불리한 내용을 숨겨 제일모직 주가가 떨어지지 않도록 관리했다고 판단해 지난해 9월 기소했다.
앞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당시 이사회를 거쳐 제일모직 주식 1주와 삼성물산 주식 약 3주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합병을 결의했다. 이에 제일모직 지분 23.2%를 보유했던 이 부회장은 합병 후 지주사격인 통합 삼성물산 지분을 확보하면서 그룹 지배력을 강화했다.
반면 이 부회장 측은 합병이 경영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합법적인 결정이었다고 반박하고 있다. 규제환경 변화 대응과 지배구조 개선, 경영권 안정화 측면에서 결정된 것이란 주장이다.
이 부회장 측 변호인단은 "통상적인 경영활동인 제일모직과 구 삼성물산 합병,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처리가 범죄라는 검찰의 시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며 "자본시장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 나아가 피고인들이 임무에 위배된 행위도 한 바 없다"고 밝혔다.
◆ 끝 없는 '사법 리스크'…삼성, 경영 시계 '제로'
이번 재판은 국정농단보다 논쟁 이슈가 훨씬 복잡한 데다 증거 기록만 19만 페이지에 이를 정도로 사안이 방대하다. 이 재판으로만 이 부회장은 최소 3년 이상 사법 리스크에 얽매여야 하는 처지다. 여기에 이 부회장은 '프로포폴 불법 투약' 의혹 사건에도 연루돼 난감한 상태다. 검찰 수사심의위는 지난달 수사 중단을 권고하는 동시에 기소 여부에 대해선 7대 7 찬반 동수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역시 기소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이 부회장을 둘러싼 재판이 계속 이어지면서 재계에선 '잃어버린 10년'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특히 삼성은 총수 부재라는 악재로 '경영 시계 제로' 상태에 놓이면서 투자에 연이어 차질을 빚자 애태우는 분위기다. 삼성은 이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 영향으로 지난 2016년 하만 인수 이후 대형 인수합병(M&A)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데다 '뉴 삼성'을 구체화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상태다.
재계 관계자는 "대형 M&A는 물론, 180조원 규모의 투자·고용 계획, 133조원 규모의 시스템반도체 사업 육성 방안 등 오너의 리더십과 결단이 필요한 사업 구상을 두고 삼성이 상당히 어려움을 겪는 분위기"라며 "반도체 패권 전쟁 속에서도 TSMC, 인텔 등 경쟁사와 달리 미국 반도체 투자 결정을 제 때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급변하는 국내외 경영 상황에서도 삼성이 총수 부재 영향으로 올 들어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여진다"며 "특히 반도체 사업에선 주요 경쟁사들이 투자를 급격히 늘리고 있지만 삼성의 대응이 늦어지면서 삼성뿐 아니라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상당히 타격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1990년대 반도체 강국이던 일본이 투자 결정 속도가 늦어지면서 공격적으로 나선 삼성전자에 밀려나 결국 반도체 시장에서 도태됐던 사례가 있다"며 "이 부회장의 부재로 한국 반도체 산업을 이끌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의사결정 타이밍을 계속 놓치다 보면 우리나라도 일본처럼 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삼성發 국가 위기론에 '이재용 사면' 요구 곳곳서 빗발
이같은 분위기로 인해 재계에선 삼성의 '잃어버린 10년'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국가 경제적으로도 손해가 크다는 의견들도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삼성이 치열한 글로벌 경쟁에 대응하며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의 부재로 경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기회 선점은 고사하고 기회 상실로 경쟁 대열에서 낙오될 것이란 관측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코로나발 경제위기 속에서 과감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진두지휘하며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데 일조해 왔다"며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 등을 고려할 때 이 부회장의 부재로 인한 삼성의 경영활동 위축은 개별기업을 넘어 한국 경제 전체에도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정·재계 주요 인사들은 최근 이 부회장을 사면시켜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을 위해선 이 부회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출신인 더불어민주당 양향자 의원은 지난 21일 "반도체 전쟁 속에서 정부는 부처별로 정책이 분산되고, 전쟁터에 나간 우리 대표 기업은 진두지휘 할 리더 없이 싸우고 있다"며 이 부회장 사면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발언을 해 눈길을 끌었다. 오규석 부산 기장군수는 지난 2월에 이어 이달 15일에도 문 대통령에게 이 부회장의 사면을 요청하는 호소문을 보냈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지난 16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공식 건의했다.
앞서 재계에서는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이 부회장의 실형이 선고되기 전부터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들을 쏟아냈다. 박용만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 1월 이 부회장의 선고공판 직전 재판부에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도 이 부회장을 사면해달라는 청원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지난 12일과 16일에 올라온 이 부회장 사면 청원글에는 1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참여했다.
종교계에서도 이 부회장의 사면을 두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불교 조계종 교구본사 주지 협의회는 지난 20일 대통령,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헌법재판소장 앞으로 "이재용 부회장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길 부탁드린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 '사면론' 두고 국민 공감대 형성…정부 '요지부동'
하지만 재계에선 이 부회장의 사면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뇌물, 알선수재, 알선수뢰, 배임, 횡령 등 5대 중대범죄 사범에 대해서는 사면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에 대한 특별사면론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박 전 대통령과 연루된 '국정농단' 재판을 받은 이 부회장의 사면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냐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선 가석방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분석했다. 가석방은 형법에 따라 형기의 3분의 1을 채운 수형자가 심사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형기의 3분의 2 이상이 지나고 교정 성적이 양호한 수형자들이 가석방으로 출소한다.
이 부회장은 올해 1월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확정받고 재수감되기 전 353일간 수감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요건을 충족했다. 선고일 기준으로 약 1년 반의 형기가 남은 상태로, 앞으로 6~8개월 정도의 형기를 마치면 가석방 심사 대상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곳곳에서 사면 요구가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정부가 요지부동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서다. 앞서 박범계 법무부장관은 지난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이 부회장의 가석방 내지 사면 문제 등에 대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박 장관은 "대통령이 반도체와 관련한 판단과 (별개로) 이 부회장의 가석방 내지 사면 문제는 실무적으로 대통령이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은 이상 아직 검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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