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1996년 6월 10일. PCS 사업자로 선정된 한국통신과 LG텔레콤(LG정보통신), 한솔PCS(한솔-데이콤)과 달리 에버넷(삼성-현대)과 글로텔(금호-효성-대우), 그린텔(중소기업)은 실의에 빠졌다.
에버넷의 경우 해제 과정에서 삼성과 현대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삼성은 당장 해제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현대는 제휴 사업이 종료된 마당에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삼성으로서는 주도권을 쥐고 통신 사업 영위에 대한 가능성의 끈을 놓지 않았으나 현대 입장에서는 PCS 탈락이 오히려 당시 추진했던 제철 사업권 획득으로 이어지는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LG텔레콤과 에버넷과의 평가점수는 7월 22일 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신규통신사업자 선정 평가자료를 제출하면서 공개됐다. LG텔레콤은 100점 만점에 84.58점, 에버넷은 82.75점으로 격차가 크지 않았다. 6개 심사항목 중 기술개발실적과 기술개발계획의 우수성 부분에서 당락이 결정됐다.
글로텔에서 빠져나온 금호는 7월 8일 LG텔레콤 컨소시엄 합류를 위한 협상에 나섰다. 호남지역 PCS 영업권을 넘겨받고 지분 5% 확보가 목적이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다만 상대 진영 견제를 목적으로 9월 9일 합의안대로 최종 확정됐다.
또 다른 글로텔 소속의 대우와 효성은 한국통신이 추진한 컨소시엄에 참여했다. 11월 1일 확정된 한국통신 PCS 자회사 지분은 대우와 효성이 각각 4.5%, 2.8%를 확보하면서 2, 3대 주주로 등극했다.
신규 이통사업자 선정이 불공정하다며 가장 크게 반발한 곳은 중소기업이 모여 있는 그린텔이었다. 정보통신부 장관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기에 더욱 극렬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정보통신부는 한국통신이 추진할 컨소시엄 구성에서 중소기업 지분을 33%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 마저도 반대하며 정통부 방침에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입장발표 4일만인 6월 18일 그린텔은 한국통신 지분 33%와 LG텔레콤, 한솔PCS의 일부 주식을 중소기업중앙회에 배정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업계 움직임을 수용한다는 뜻을 내비치며 강경입장을 완화하는 노선으로 전환했다. 구심점을 잃은 그린텔은 연말까지 좌충우돌하다 각 PCS 사업자에 일부 흡수됐다.
비장비업체군의 평가점수는 한솔PCS가 81.17점으로 6개 항목 중 5개 항목에서 1위를 차지하며 가장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 그린텔이 78.39점, 글로텔은 76.8점으로 나타났다.
◆ LG텔레콤·한솔PCS 출범
6월 10일 선정발표를 들은 LG그룹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다만, 대규모 자축 행사 대신 소소한 회식자리를 마련했다. 구본무 LG그룹회장과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 등은 서울 여의도 트윈타워 지하 1층 식당에서 약 2시간 가량 생맥주 파티를 열었다. 100여 명 이상의 직원이 참석한 이 파티는 생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됐다.
정장호 사장은 국민과 정부에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국내에서 최적의 장비 선택과 저렴한 서비스 요금을 통해 국민에게 최사으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해외에도 적극 진출해 국내 통신산업의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키겠다고 말했다.
LG그룹은 우선 정장호 LG정보통신 사장을 LG텔레콤 사장으로 선임하고 공석인 LG정보통신 대표를 물색했다. 7월 4일에는 임직원 150여명이 참석해 서울 서초동 반도빌딩에서 기념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LG텔레콤의 산실. 반도빌딩 8층 영원히 기억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달 11일 LG텔레콤은 드디어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정장호 사장을 LG텔레콤 대표로 정식 선임하고 정보통신부로부터 사업권을 받아 1998년 1월부터 수도권 지역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2년 이내 전국 서비스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저렴한 요금과 최고 품질 통신서비스 제공을 약속했다.
LG텔레콤은 LG정보통신과 LG전자, LG반도체 등 LG그룹계열 3개사와 더불어 117개 기업으로 구성된 컨소시엄의 결과였다. LG그룹이 지분은 29%, 자본금 총 2천억원으로 출범했다. 2000년 초반 매출액 5천700억원을 예상했다. 또한 전국망 구축을 위해서 8천300억원을 투자한다는 복안이었다.
한솔그룹 역시 축제 분위기였다. ‘한솔플랜 2000’을 세우고 탈제지에 박차를 가하던 한솔 입장에서 PCS 사업권 획득은 정보통신을 주력사업으로 키울 수 있는 기회였다. 한솔PCS 수장으로는 정영문 한솔기술원장을 세웠다. 정 대표는 한솔 계열 전체가 총력을 다한 결과로, 계획대로 철저하게 사업준비를 해 1998년 서비스 개시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한솔은 발 빠르게 움직여 선정 10여일만인 6월 20일 한솔PCS 사업설명회를 개최했다. 1998년 1월 상용화를 목표로 자본금을 5천억원으로 증자한다고 밝혔다. 2000년부터 전국 서비스로 확장해 2002년까지 1조32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내 시장 점유율도 35%를 목표로 세웠다.
이어, 한솔PCS는 8월 1일 한국종합전시장 국제회의실에서 창립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공식 출범했다.
◆ 한국통신프리텔 출범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PCS 사업권에 도전했던 LG텔레콤, 한솔PCS와는 달리 한국통신은 사업권을 따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역방향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대표를 선임하고 컨소시엄을 구성해 자회사 설립까지 이뤄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선정 10일후인 6월 20일 한국통신은 무선통신사업추진계획을 발표하면서 이상철 한국통신 무선사업본부장을 신규 자회사 대표로 선임했다. 초기 자본금 5천억원, 초기인력 400여명의 PCS 자회사를 연말께 출범시키겠다고 밝혔다.
7월 3일 대전인력개발본부에서 열린 ‘KT비전2005’에서는 무선통신사업을 2000년까지 제1사업자로 부상시키겠다고 단언했다.
한국통신은 11월 1일 컨소시엄을 확정해 발표했다. 한국통신은 33.33%, 한국통신 계열사와 직원 12%, 대기업은 10.3%, 외국기업은 9%, 중소중견기업에게는 약속했던 36%를, 대우 4.5%, 효성 2.8%로 배분됐다. 이 자리에서 이상철 대표가 정식 선임됐다. PCS자회사명이 최초 공개되기도 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이 잠정 확정됐다.
12월 27일 오전 11시 서울 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마침내 한국통신프리텔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한국통신프리텔은 서울 중구 서소문동의 장안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현판식은 해를 넘긴 1997년 1월 6일 가졌다.
◆ ‘016·018·019’의 탄생
한국이동통신 ‘스피드 011’, 신세기통신 ‘파워디지털 017’.
당대 이통사를 대표했던 브랜드는 다름아닌 식별번호였다. 사업자는 몰라도 식별번호는 알 수 있었던 시대였다. 그만큼 식별번호는 향후 사업을 영위함에 있어 막대한 영향력을 주는 핵심 키워드였다.
이에 따라 정보통신부도 ‘정보통신번호체계 개선 전담반’을 마련하고 ‘신규통신사업자 서비스 식별번호 부여 방안’을 추진했다. 초기 설계했던 PCS 식별번호는 ‘018’이었다. 다만 사업자는 3곳. 때문에 식별번호는 3자리에서 4자리로 늘어났다. ‘0182, 0183, 0184’가 해당 후보군이다.
018 이외에 가용할 수 있는 식별번호로 ‘016’과 ‘019’가 있기는 했으나 전자는 무선호출공통식별번호로 활용할 예정이었고, 후자는 예비번호로 확보해야 했다.
9월 2일 열린 신규통신사업자 서비스 식별번호 공청회는 그야말로 뜨거웠다. ‘018X’ 부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는 정보통신부와 이전 이동전화(CDMA) 식별번호와 동일한 세자리수를 원하는 PCS 사업자와의 강대강 구도가 형성됐다. 대체적으로 불이익을 고려해 정부 입장에 큰 반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았으나 식별번호 만큼은 양보가 없었다. 011과 017이 있는 이상 018X는 꽤 불리한 번호였다.
정보통신부와 PCS 3개 사업자, 한국이동통신, 신세기통신은 10일 양평 프라자콘도에서 또 다시 난투전을 겨뤘다. 정부와 PCS간 입장은 변함이 없었으나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은 오히려 향후 경쟁을 해야할 PCS 사업자 편을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들도 네자리수로 회귀할 수도 있고 고객 관점에서도 혼란만 야기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연말까지도 정보통신부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27개 신규사업자가 사업채비를 갖추고 있기에 예비번호 자원이 부족하다는게 이유였다. 서비스별로 한개의 식별번호를 부여한다는 방침은 여전했다. PCS에게는 ‘018X’ 이외에는 없다는 얘기였다.
양보없는 혈전만 거듭했던 정보통신부는 해를 넘긴 1997년 1월초부터 입장을 일부 유보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016과 019를 풀겠다는 심경을 내비친 것. 결국 1월 7일 정보통신부는 새 사업자의 조기 경쟁력을 확보하고 기존 사업자와의 공정경쟁환경 조성이라는 명분으로 식별번호 세자리수 배정을 공식화했다.
PCS 사업자는 즉각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당초 PCS 고유 식별번호였던 ‘018’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는 했으나 우리나라에서 기피하는 비속어와 비슷했기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016은 신세기통신의 017보다 앞선 번호였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는 했으나 발음상 매끄러운 연결이 어려웠다. 이와는 달리 019는 발음이 쉽고 마케팅 측면에서 활용도가 높기는 했으나 끝자리라는 게 걸렸다. 각 사업자는 원하는 식별번호에 대한 선호도를 조사하는 한편 보안에 최대한 신경써 정보통신부에 의견을 전달했다.
마침내 1월 30일 정보통신부는 통신위원회를 개최하고 신규 통신사업자 식별번호를 확정했다. 한국통신프리텔은 ‘016’, 한솔PCS는 ‘018’, LG텔레콤은 ‘019’가 부여됐다. 이동통신 5개 사업자를 대표하는 식별번호가 모두 확정된 순간이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목차
1편. 삐삐·카폰 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2편. 1세대 통신(1G)
⑥ 삼통사 비긴즈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3편. 제2이동통신사 大戰
⑪ 제2이통사 大戰 발발…시련의 연속 체신부⑫ 제2이통사 경쟁율 6:1…겨울부터 뜨거웠다⑭ ‘선경·포철·코오롱’ 각축전…제2이통사 확정⑮ 제2이통사 7일만에 ‘불발’…정치, 경제를 압도했다⑯ 2차 제2이통사 선정 발표…판 흔든 정부·춤추는 기업⑰ 최종현 선경회장 뚝심 통했다…’제1이통사’ 민간 탄생⑱ 신세기통신 출범…1·2 이통사 민간 ‘경합’4편. CDMA 세계 최초 상용화
⑲ ‘라붐’ 속 한 장면…2G CDMA 첫 항해 시작⑳ 2G CDMA "가보자 vs 안된다"…해결사 등판㉑ CDMA 예비시험 통과했지만…상용시험 무거운 ‘첫걸음’㉒ 한국통신·데이콤 ‘TDMA’ vs 한국이통·신세기 ‘CDMA’㉓ 한국이동통신 도박 통했다…PCS 표준 CDMA 확정㉔ ‘디지털·스피드 011’ 탄생…세계 최초 CDMA 쾌거㉕ ‘파워 디지털 017’ 탄생…신세기통신 CDMA 상용화5편.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개막
㉖ 제3 이동통신사 찾아라…新 PCS 선정 개막㉗ ‘LG텔레콤 vs 에버넷’…‘한솔PCS vs 글로텔 vs 그린텔’/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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