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기자] "재벌 총수는 수천억원씩 남의 돈을 도둑질해도 경영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는 핑계로 면죄부를 주는 잘못된 관행을 끊어야 한다."
16일 거액의 횡령과 배임으로 회사에 피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선고공판이 열리기 몇시간 전 새누리당에서 터져 나온 말이다.
예전 같으면 야당이나 경제관련 시민단체에서 나올 법한 발언이 이번엔 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당 재벌 총수를 직접 거론하며 불거져 나왔다.
결국 김 회장은 이날 징역 4년에 벌금 51억원의 실형을 선고받고 변호인단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법정 구속됐다.
비록 1심이긴 하지만 과거 재벌 총수들에게는 경제발전 공헌 등을 들먹이며 집행유예가 공식처럼 선고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진 셈이다. 한화그룹은 물론 재계가 충격과 당혹감에 빠진 것은 물론이다.
지난해 정부의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에 반기를 들었던 재계가 연말 대선을 앞두고 불고 있는 경제민주화 바람에 바짝 몸을 사리고 있다.
재계는 작년까지만 해도 정운찬 전 총리가 주도하는 초과이익공유제로 대변되는 동반성장 정책에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했던 삼성 이건희 회장은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들어보지도 못했고 이해도 안간다"며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를 떠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폄하했다. 덧붙여 MB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는 '절반의 성공'이라며 사실상 낙제점을 줬다.
하지만 올해엔 상황이 역전되는 분위기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여야를 막론하고 4.11 총선을 기점으로 경제민주화를 대선 핵심 공약으로 띄우고 있기 때문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임기 내내 대기업 성장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치며 '낙수효과'를 홍보하던 MB정부와의 차별화를 위해 더욱 경제민주화에 올인하고 있다. 당내에서만 전·현직 의원 48명이 '경제민주화 실천모임'이란 이름으로 뛰고 있을 정도다.
민주통합당 등 야당 역시 '재벌세' 신설 등을 내세우며 재벌 개혁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정권 말 여러 위기상황에서 국정 타개책으로 나온 경제민주화이지만 파괴력이 상당하다.
무엇보다 유력한 대선후보 중 하나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최근 자신의 저서 '안철수 생각'에서 이같은 재벌 개혁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경제민주화가 이번 대선의 승부를 가르는 핵심 키워드임이 분명해 지고 있다.
특히 안 원장은 과거 삼성과 LG를 삼성동물원-LG동물원에 비유하면서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상대로 경쟁할 수 있는 자본을 축적할 수 없도록 묶어두는 '독점 계약'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언급해 재계의 고민이 적잖다.
현재 여야 정치권에서 말하는 '재벌 개혁'은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재벌기업에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 그동안 한국 경제의 중심 구조였던 대기업 독과점 경제구조를 중소기업 육성 위주의 경제구조로 전환하자는 데 모아진다.
이를 통해 대기업의 자본 집중이 낳고 있는 경제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고 반칙과 불공정거래를 차단, 공정한 룰로 경쟁해 '경제 정의'를 이루자는 정서가 '시장 질서 훼손', '입법 포퓰리즘'이라는 반대 의견보다 강하다.
핵심에는 대기업에 대한 특혜를 폐지하고 순환출자금지-출자총액제한 부활-금산분리강화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 밖에 대기업 계열사간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한 징벌적 배상제 도입과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갖가지 정책들이 경쟁적으로 제안되고 있다.
결국 재벌 기업에 대한 감시·감독시스템을 강화하자는 말인데 정치권의 유력 대선 주자 캠프들이 이같은 정책에 어느 정도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데 재계의 불안감이 크다.
그러나 이 같은 경제 민주화에 대한 생각과 제안이 어디까지 현실적 대안으로 추진되느냐는 아직 미지수다.
선거 때마다 재벌중심의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정책적 구호는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그 때마가 '경제 위기' 운운하며 '언제 그랬냐'며 안면을 바꿔온 정치권이다. 전경련 등 재계가 경제 민주화를 '대기업 때리기'라고 반발하고 있는 것도 말만 앞섰던 과거 정치권의 행실에 기인한다.
하지만 대선을 불과 4개월여를 앞둔 현 시점에서 민심을 읽는 정치권의 일렬의 징후들을 들여다 볼때 경제민주화가 한국 사회를 바꾸는 현실적 대안으로 힘을 얻을 가능성이 점차 높아 보인다.
재벌 총수의 실형과 구속이 경제민주화의 실현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시 공염불에 그칠지 향후 정치권의 실천적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진호기자 jhjung@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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