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허인혜 기자] "100% 블라인드 채용은 솔직히 안 믿기죠. 주변을 둘러보면 그래도 어학성적 900점 이상에 학점 3.5를 맞춰 놓고 자격증이며 인턴 경험이며 '고스펙' 준비를 해야 한시름 놓아요".
금융권이 '블라인드' 채용을 강조하며 개최한 대규모 채용박람회에서도 취업 준비생과 금융사, 금융당국의 시각차는 또렷했다. 채용 상담을 진행한 금융사 관계자들은 "이력서도 필요 없다"며 전면적인 블라인드 채용이 시행 중이라고 답했다. 반면 금융권 취준생들은 '기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닐까 하는 걱정을 떨치지 못했다.
은행과 보험, 금융투자업계와 카드, 저축은행 등 금융 전업권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채용 박람회가 29일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문을 열었다. 박람회에는 59개(은행14, 보험15, 금투9, 카드8, 저축은행3, 공공기관10) 금융사가 참여하며 이날부터 30일까지, 오전 10시에 개장해 오후 5시 마감된다.
최종구 금융위원장 등 금융권 고위 인사들도 취업 한파를 염두에 두고 말문을 뗐다. 김태영 은행연합회장은 "채용절차 모범규준을 제정해 신규 채용자의 역량과 무관한 성별, 나이 등을 배제하는 블라인드 채용을 실시하겠다"고 전했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은 이날 축사를 통해 "취업 적령기인 '에코세대' 청년들은 취업시장에 뛰어드는 인구의 증가로 인해 더 큰 어려움을 체감하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취준생 "금융권, 블라인드 채용 한다지만…불안한 마음에 자격증 '수집'"
"토익은 900점이 넘고, 학점은 3점대 중후반이요. 3점대 중반이 높은 편은 아니라 정확히 말하기 부끄러워요".
이날 박람회장을 찾은 정태진씨(29)는 최근 금융권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에는 '알고 있다'고 답했다. 조심스럽게 어학점수와 학점을 묻자 900점·3.5점 이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취업준비생 김민지씨(24) 역시 "주변에서 금융권 취업을 준비하는 구직자들을 보면 어학성적과 학점은 갖춰두고 인턴 경험과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설명했다. 블라인드 채용이라는 데도 정량점수를 쌓는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다.
금융권을 함께 준비하는 연인 김씨(28), 양씨(27)도 같은 고민을 털어놨다. 김씨는 "블라인드 채용이라는 말은 안 믿긴다. 자기소개서를 기반으로 면접을 보다 보니 학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만한 경험을 물어본다"며 "모 은행을 제외하고는 블라인드 채용을 지킨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앳된 얼굴로 박람회장을 찾은 고등학생들도 "뱃지(금융사 로고 뱃지) 단 사람들 멋있다"고 혼잣말을 하다가도 고졸자와 대졸자 사이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편 일부 취준생들은 짧은 면접 시간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기차 시간에 늦어서 빨리 가야 해요, 저희 5분 봤어요 면접". 부산에서 온 세 명의 25살 동갑내기 친구들은 기차 시간에 임박해 급한 걸음을 옮겼다. 부산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올라온 이들이 따낸 면접시간은 단 5분이다. 사전 면접신청을 했던 대학 졸업반 박씨(25)도 "질문을 준비해오면 면담 시간을 꽉 채워 쓸 수 있었지만, 밀린 인원이 많아 30분도 채 상담하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이력서 필요 없어요" 관계자들 '블라인드' 강조에 "그래도 정량평가" 반박도
비상경계 전공자, 신입사원으로는 늦은 나이, 어학성적은 만료된 금융권 '무스펙' 기자도 현장 순서를 기다려 보험사와 카드사 등에 면담을 신청했다. 이력서를 준비해왔다고 말하자 "이력서는 필요하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A카드사 관계자는 "이력서 안의 점수나 학벌 등을 보고 왈가왈부하는 일이 요즘 채용시장에서는 흔하지 않다"며 "부득이하게 서류 심사에는 활용할 수 있지만 고차로 올라가면 임원들도 지원자들의 배경을 알지 못한 채 면접을 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카드사 관계자도 "자격증이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금융사가 원하는 건 그 안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자격증을 준비했느냐, 이 업권에 대한 이해도가 얼마나 높으냐다"라며 "단순히 자격증만 있고 금융사의 실제 업무에 관심이 없다면 실무 분야에도 귀를 기울였던 구직자가 채용된다"고 말했다.
금융권 '취뽀' 선배들의 조언도 다르지 않다. 은행에 재직 중인 직장인 A씨는 지난 2016년 취업에 성공했다. 이직 전 직장도 금융 관련업권이었지만 A씨의 목표는 본래 유통업계였다. A씨는 "금융권 준비에 앞서 데이터를 다루는 통계 업무를 준비했고, 그러다 보니 금융권에 어울리는 인재상으로 비치게 됐다"며 "금융권에 딱 맞춘 정량점수를 높이기 보다 직무적합성이 우선한 듯 하다"고 추론했다.
다른 금융업권에서 최근 신탁사로 자리를 옮긴 B씨 역시 "첫 취업 당시 채용비리로 한참 시끄러웠을 때라 블라인드로 진행됐다"며 "면접 볼 때도 이름을 밝히지 못하게 하고 임의 번호를 부여했다"고 답했다. 지난해 보험사에 입사한 C씨도 "보험사는 기본적으로 복지와도 가까운 분야로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드러내며 뽑힌 것 같다"고 전했다.
다만 관계자 사이에서도 정량평가가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오는 등 입장이 갈렸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역량이 똑같은 두 사람을 두고 마지막 선택을 한다면, 그래도 SKY출신을 뽑지 않겠느냐"며 "높은 대학 출신이 면접에서 잠깐 떨었다고 해서 그게 본 모습이라고 보기에도 어렵다"고 토로했다.
허인혜기자 freesia@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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