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보래이. 가령 100개 가운데 1개만 불량품이 섞여 있다면 다른 99개도 모두 불량품이나 마찬가진 기라. 아무거나 많이 팔면 장땡이 아니라 한 통을 팔더라도 좋은 물건 팔아서 신용 쌓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그들은 와 모르나."
LG그룹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은 지난 1931년 7월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의 문을 열었다. 값을 깎아주지 않는 장사꾼으로 유명했지만, 포목의 자를 속이지 않아 고객들의 '신용'은 두터웠다.
구 회장은 포목을 비수기에 싸게 사들였다가 성수기에 비싸게 팔아 이윤을 올리며 상점을 운영했다. 1936년 대홍수 뒤의 풍작에 따른 포목 경기의 상승을 예견하고 쌀 200가마 값에 해당하는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을 사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후 풍년의 호경기로 포목이 잘 팔려 구 회장은 많은 이익을 남겼다.
연암이 소상인적 기업가에서 탈피해 근대적 기업가가 된 것은 지난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다. 해방의 감격과 소용돌이 속에서 연암은 재빨리 그 해 9월 부산으로 이주해 서대신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구매한 후 자리를 잡았다. 11월에는 무역업을 주로하는 조선흥업사를 설립했고, 1946년 2월에는 화장품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화장품 판매업에 성공한 연암은 크림을 직접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지난 1947년 1월 LG그룹의 모태가 된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해 '럭키표크림'을 생산했다. 이는 LG 역사의 시발점이 됐다.
27일 재계에 따르면 LG그룹은 이날 창립 75주년을 맞았다.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이 지난 194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직원 20명과 함께 시작한 락희화학공업은 현재 국내외 26만명의 직원과 연매출 170조원의 글로벌 기업 LG로 성장했다.
LG는 화학·에너지, 전자·정보통신, 금융, 서비스 등 산업전반에 걸쳐 한국경제를 선도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속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해 왔다. 또 불모지였던 화학산업과 전자산업을 일구어낸 개척자로도 평가받고 있다.
특히 지난 1958년 설립된 금성사는 국산 라디오와 전화기, 흑백TV, 세탁기 등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2004년에는 세계 최초로 42인치 TFT LCD를 개발하고 2006년에는 2천600mAh급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올레드(OLED) TV도 LG가 보유한 '세계 최초' 목록 중 하나다. 또 플렉서블 와이어와 배터리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등 산업 역사와 함께 성장했다.
재계 관계자는 "해방과 6.25전쟁 참화 후의 폐허나 다름없던 비참한 생활환경 속에 빠져있던 이 땅에 LG는 '한번 다시 세워 보자'는 정신을 심어준 기업"이라며 "그 결과 가정생활은 물론 산업전반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했다.
현재 LG그룹을 이끌고 있는 구광모 회장은 최근 '선택과 집중' 전략을 앞세워 미래 준비에 본격 나선 모습이다. 구 회장은 지난해 모바일 사업에 이어 올해 태양광 사업을 정리한 대신, 로봇·전장·AI와 함께 블록체인·의료기기 등 신사업을 미래 먹거리로 내세우고 있다. 2018년 취임 후 '실용주의'를 강조한 구 회장의 의중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구 회장이 취임한 후 LG 계열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2018년 9월에는 LG서브원 소모성 자재 구매 대행 사업 부문이 분할 매각됐고, LG디스플레이는 조명용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2019년 4월), LG유플러스는 전자결제(2019년 12월), LG화학는 편광판(2020년 6월) 사업 등에서 철수했다. LG전자는 모바일(2021년 7월) 사업과 태양광(2022년 2월) 사업을 접었고, 지난 2020년 2월 중국 베이징 트윈타워도 매각했다. 구 회장 취임 이후 정리된 사업만 해도 10여 개에 이른다.
반면 구 회장은 가전, IT 등의 핵심사업과 로봇, 전장 등 미래사업에 대해선 육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자동차부품 사업에선 세계 3위 자동차부품업체인 마그나 인터내셔널과 손잡고 전기차 파워트레인 분야 합작법인 LG마그나 이파워트레인을 설립, 신사업의 성장 잠재력을 키우고 있다. 또 지난해 차량용 보안 솔루션 업체 사이벨럼을 인수하고, 룩소프트와 함께 차량용 운용체계(OS) 사업을 위해 설립한 알루토는 최근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LG화학의 배터리 소재 사업 육성을 위해선 지난해 LG전자의 화학·전자재료 사업을 인수해 사업 경쟁력도 강화했다.
LG전자를 통해선 전통적인 하드웨어 제조에서 벗어나 블록체인 사업을 통해 소프트웨어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LG전자는 지난 24일 '제20기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관 변경 승인을 통해 블록체인과 의료기기 등 신사업을 추가하며 사업구조 고도화에 나섰다.
또 구 회장은 재임 기간 동안 로보스타, 우지막코리아, ZKW라이팅시스템즈코리아 등 전기차, 로봇 등 신사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을 LG그룹에 신규 계열사로 편입시켰다. 2018년 LG테크놀로지벤처스, 2020년 AI연구원, 올해 미국 내 LG AI 리서치 센터 등을 잇달아 설립하며 AI(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속도를 내고 있다.
신사업 확대를 위한 외부 인재 영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지난해 3분기에 LG전자로 온 이민 상무, 이향은 H&A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 이재호 렌탈케어링사업센터장이 대표적인 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교수도 로봇 사업 고도화 자문역으로 영입해 눈길을 끈다. 그룹 싱크탱크가 된 AI연구원의 경우 이홍락 CSAI, 배경훈 원장이 영입됐다.
구 회장의 이 같은 움직임은 '고객 중심 경영'이 밑바탕이 됐다. 구 회장은 지난 2019년 회장 취임 후 발표한 첫 신년사를 통해 LG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고객가치 실천'을 제시한 후 줄곧 임직원들에게 이를 강조하고 있다.
창립기념일을 사흘 앞둔 지난 24일 사내 방송을 통해 방영된 75주년 기념 영상 '우리, LG인이었습니다'에서도 구 회장은 "지난 75년, LG의 여정에는 늘 한결같은 고객과 우리 LG인들의 도전이 있었다"며 "앞으로도 고객과 LG의 더 가치 있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그간 보수적이었던 LG가 AI, 로봇 등 신사업에 적극 대응하고 나선 것은 평소 높은 관심을 보였던 구 회장이 일찌감치 그룹의 차세대 방향성을 4차 산업혁명에 맞췄기 때문"이라며 "구 회장이 취임한 후 LG가 대대적으로 조직 개편에 나서는 한편, 사업부를 정리하고 인수·합병(M&A)을 활발하게 진행하며 이전과 달리 발 빠르게 변화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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