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이건희) 회장님의 영결식 추도사에서 나온 '승어부(아버지를 능가하다)'라는 말이 머릿 속에 맴돈다. 경쟁에서 이기고 회사를 성장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신사업 발굴도 당연한 책무지만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다."
지난해 1월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승어부' 경영을 다짐했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현지 사업 점검을 위해 11박 12일 일정으로 7일 유럽으로 떠났다. 29년 전 고(故)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장 중 '신경영'을 선언한 날에 출장을 간 만큼,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이번에 '제2의 삼성 신경영' 선언과 함께 다시 한 번 위기 속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이건희 회장은 지난 1993년 6월 7일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라, 극단적으로 농담이 아니라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임직원들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 당시 후쿠다 다미오 고문에게 삼성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홀대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직후였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삼성의 분위기는 이 회장의 '위기론'이 과하다고 생각한 임직원이 다수였다"며 "이미 국내 대표적인 대기업으로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이 회장의 위기론으로 미리 예방주사를 맞았던 삼성은 1997년 외환위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다"며 "신경영 선언은 반도체 불모지였던 한국을 세계 1위의 반도체 국가 반열에 올리는 등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최근 삼성전자는 다시 위기감에 휩싸였다. 주력 사업인 반도체와 스마트폰, 가전 등에서 전반적인 어려움이 감지되고 있어서다.
특히 반도체에선 올 초부터 4나노 공정의 수율(제조품 중 양품의 비율) 향상과 관련된 대외 우려 등이 끊이지 않았다. 또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를 위한 기술력 확보에 대한 의구심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지난 1분기 컨퍼런스콜에서 반도체 담당 임원들이 직접 나서 "사실과 다르다"고 해명까지 나섰지만, 결국 이달 초 반도체 관련 연구 임원들이 대거 교체되는 등 강경책이 이어졌다.
업계 관계자는 "연말 정기인사를 단행한 지 6개월 만에 부사장급 10여 명이 이번에 한꺼번에 교체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파운드리 등 미래 전략 분야에서 더욱 획기적인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사업 역시 불안한 상태다. 스마트폰 사업 정체가 이어지고 올 초 게임옵티마이징서비스(GOS)논란까지 일면서 소비자들의 신뢰가 떨어졌다는 점은 뼈아프다. 또 국내외 경기 악화에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삼성 스마트폰 판매 부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 불안은 더 커지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올해 전체 스마트폰 출하량 목표 역시 연초 3억3천400만 대로 잡았다가 최근 2억7천만~2억8천만 대 수준으로 낮췄다.
이에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사업 경영진단을 지난해에 이어 최근에 또 진행했다. 이달 첫 주에는 최고경영진이 경영진단 결과를 두고 추가 논의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2년 연속 스마트폰 사업 경영진단에 나선 것은 모바일 사업이 비상 상황이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일 이후 올해 연말에는 대규모 조직개편과 인사 교체가 단행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가전사업 역시 부진이 예고된 상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국 코로나 봉쇄, 원자재·물류비 상승 등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을 것으로 보여서다. 특히 올 초 2억1천700만 대로 예상됐던 세계 TV 시장 전망이 최근 2억1천200만 대로 낮춰지는 등 전반적인 가전 수요 급감이 예상된다는 점도 내부에선 고민거리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반도체 외 스마트폰, TV·가전 사업에선 치열한 가격 경쟁에 성장세마저 주춤한 '레드 오션' 시장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며 "반도체 사업 호황으로 올해 1분기까진 실적이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스마트폰, TV·가전 등 다른 사업의 부진을 가리는 이른바 '반도체 착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어 "반도체 시황이 꺾이게 되면 삼성전자 실적도 급강하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위기감은 클 것"이라며 "새로운 미래 사업 발굴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삼성전자는 지난달 조직 개편에서 경영지원실 지원팀 산하에 대외 리스크를 통합 관리하기 위한 컨트롤타워 조직인 BRM(사업위기관리)그룹을 신설했다. 최근까지 MX(스마트폰)사업부 산하에 구매전략그룹, VD(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산하에 글로벌 운영팀, 생활가전사업부 산하에 원가혁신TF 등의 조직을 두고 대외 위기 대응에 나섰지만, 사업부별 조직에선 효과적인 대응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서다.
'사법 리스크'로 경영 활동에 제약이 많은 이 부회장도 잠행을 끝내고 직접 나선 모습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이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분석된다. 앞서 이 부회장은 지난 2일 열린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의혹 재판에서 해외출장으로 인한 불출석 이유서를 제출해 재판부가 이를 허가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곳은 반도체 장비업체인 ASML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다. 한 해 40여 대 수준만 생산되는 EUV(극자외선) 노광장비를 선점하는 것이 파운드리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20년 10월에도 ASML 본사를 찾아 EUV 장비 공급을 직접 요청한 바 있다.
또 지멘스, BMW가 있는 독일도 갈 것으로 관측된다. 지멘스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첨단 공정에 설계자동화 도구 등을 제공하고 있다. BMW와는 차량용 반도체,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현지 법인에도 들러 임직원들과 만남을 가질 것으로 전망된다.
일각에선 이번 출장에서 인수합병 계획도 구체화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의 M&A 후보군으로 거론됐던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 인피니온 등이 유럽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국에 본사를 둔 반도체 설계회사 ARM도 매물로 나온 상황인 만큼 이를 논의하기 위해 영국에 방문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현재 ARM 인수전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곳은 SK하이닉스로, 미국 퀄컴과 손잡고 추진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최근 팻 겔싱어 인텔 CEO와 회동한 것이 함께 ARM을 인수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있다"며 "이 부회장이 새 정부 들어 2030년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 목표 달성을 위한 경영에 적극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이번에 M&A와 관련해 가시적인 성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계에선 이 부회장이 이번 해외 출장 재개를 두고 삼성의 위기감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도 내놨다. 재판부에 공개적으로 출장 허락을 구한 것이 이를 대변한 것이란 해석이다.
또 지난달 450조원의 투자 계획을 밝힌 것도 이의 연장선상으로 해석했다. 새로운 미래 질서가 재편되고 한국 경제의 발전과 쇠락을 가르는 변곡점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에서다. 이 부회장 역시 '450조원 투자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에게 "목숨 걸고 하는 것", "앞만 보고 가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자유로운 경영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선 '사법 리스크' 해소가 가장 급선무란 평가다. 일단 이 부회장은 오는 2023년 1월까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부당 합병 혐의와 관련한 공판 계획이 잡혀 있어 대규모 투자 집행과 경영 참여가 자유롭지 않다. 여기에 다음달 29일 가석방 형기가 만료되지만, 이전에 사면이 되지 않는다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향후 5년간 취업 제한이 걸린 상태가 이어져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어렵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아버지의 업적을 뛰어넘기 위해 이번에 신경영 선언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떠나 어떤 성과를 달성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면서도 "경제 불확실성이 가중되는 상황인 만큼 이 부회장이 자유롭게 경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사면·복권이 하루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역시 최근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6경제단체장이 만나는 자리에서 "최근 많은 기업들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며 "노동 개혁, 세제 개선 등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에서 활발하게 뛸 수 있도록 이재용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 등 기업인들 사면도 적극 검토해주시기를 바란다"고 요청했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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