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따로 또 같이 3.0'이라는 새로운 닻을 단 SK호(號)의 순항 여부에 재계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향후 SK그룹의 10년을 좌우하게 될 새로운 경영체제의 도입 원년을 이끌어 나갈 새 수장은 김창근(사진)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다. 김 의장은 그룹 가치 300조원이라는 목표 달성까지 공언한 상태다.
SK그룹의 정기인사가 임박한 가운데, 김 의장의 거취에 재계의 이목이 새삼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SK그룹은 올해부터 '따로 또 같이 3.0'으로 명명된 신(新) 경영체제를 도입한다. '따로 또 같이 3.0'의 핵심은 최태원 SK㈜회장이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배제되는 것, 즉 계열사의 완전한 독립경영으로 압축된다.
이에 따라 '따로 또 같이 3.0 체제'에서는 각 계열사 CEO(최고경영자)들의 협의체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대내외적으로 그룹을 대표하게 된다.
그동안 대지분을 소유한 오너가 그룹 총수로써 기업의 크고 작은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던 것과는 달리, 각 계열사의 의견을 수렴·조율해 결정해야 하는 김 의장의 역할이 그만큼 더 중요해진 셈이다.
SK는 "김 의장은 선대회장 때부터 그룹 고유의 경영시스템을 진화, 발전시킨 원로 경영인으로서 계열사 이해관계의 거중 조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김창근 의장 리더십 강화에 힘 실어줄 듯…SK케미칼 경영서는 손 떼
8일 재계에 따르면 올해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SK의 '따로 또 같이 3.0' 경영체제의 성공 여부가 국내기업들 사이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SK그룹 사정에 정통한 한 재계 관계자는 "SK의 '따로 또 같이 3.0'의 핵심인 계열사의 독립경영과 수평적 의사결정 구조의 안착 여부는 김창근 의장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김 의장이 전문경영인으로써 각 계열사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려 모든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해 추진해야 하는 만큼, 그룹 차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김 의장에게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현재 김 의장은 SK케미칼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고 있지만, 서울 서린동 SK 본사로 출근해 그룹을 총괄하는 의장 업무를 보고 있다.
SK그룹 전반의 경영과 의사결정을 책임지게 된 상황에서 계열사 경영을 병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부회장이 경영을 전담하고 있는 SK케미칼이 그룹의 대표성을 지니기 어려운 기업이라는 점도 이 같은 관측에 무게를 더한다.
SK그룹 관계자는 "새로운 경영체제에서 수펙스 의장의 역할이 무척 중요해진 만큼, 의장 업무와 계열사 경영을 병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김 의장이 SK케미칼 대표이사 부회장에서 조만간 사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경영체계를 이끌 김 의장의 권한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회장 승진 등 그룹 차원의 인사 조치가 이뤄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그룹 회장이라는 직함이 법적인 지위가 아닌 만큼, 회장에 오른다면 CEO 겸임 가능성도 높다.
◆최태원 회장 입김 배제될까 '의문'…김창근 '원톱' 체제 구축해야
재계의 이 같은 전망은 '따로 또 같이 3.0' 체제에서 최 회장의 입김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 것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하겠냐는 의문에서 비롯된다.
SK는 최 회장이 현재 SK㈜,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대표이사로 있는 계열사 경영에만 관여할 뿐, 그룹 단위의 의사결정에는 다른 계열사 CEO와 동일한 발언권을 지니게 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 지난 2일 열린 신년교례회도 김 의장이 주재했다. 이 행사는 그동안 통상적으로 그룹 총수인 최 회장이 신년사와 경영 목표를 발표했던 자리였다.
최 회장은 이날 행사에는 불참한 채 중국 현지에서 신년메세지를 통해 "앞으로 그룹단위 의사결정은 수펙스추구협의회와 각 위원회에서 진행될 것"이라면서 "그룹 내 회사들이 글로벌 성장동력을 발굴하는 데 서포터로서의 역할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상 최 회장이 그룹 총수에서 물러나 전략적 대주주로서의 그룹 성장의 큰 밑그림을 그리는 조력자 역할에만 집중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그룹의 실질적 의사결정권이 최 회장에서 김 의장에게로 옮겨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과연 그룹 내 핵심적인 의사결정에 최 회장의 영향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다는 게 재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일각에서는 김 의장이 최 회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SK의 신 경영체제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김 의장이 최 회장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점도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김 의장은 지난 2003년 SK그룹 구조조정 본부장 시절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및 SK해운 부당지원 등 업무상 배임 혐의로 최 회장과 함께 형사처벌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 경제개혁연대 관계자는 "이런 인사가 SK그룹의 계열사도 아닌, 그룹 전체를 대표하는 직위에 오른다는 것은 SK그룹 전체에 상당한 위험요소라 할 수 있다"면서 "SK그룹이 신경영체제를 선언하면서 계열사별 자율책임경영을 도입하고 지배주주가 아닌 전문경영인에게 그룹의 대표를 맡기기로 한 것은 지주회사 전환의 취지에 부합하는 것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경영인이 과거 최태원 회장과 함께 불법에 연루된 인사라는 점은 매우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심지어 최 회장이 신년교례회에 참석하지 않은 것과 관련, 오는 31일 예정돼 있는 공판을 앞두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모양새를 분명히 하려는 처사가 아니냐는 부정적인 관측까지 나온다. 검찰 수사 관계로 신년교례회를 진행하지 않았던 지난해를 제외하면 최 회장이 그룹 신년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대해 SK 측은 전혀 근거없는 추측이라는 입장이다. SK그룹 관계자는 "일각에서 최 회장의 재판과 연결시켜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측"이라며 "이번 신년교례회 불참과 중국 베이징 방문은 그룹 총수에서 물러나고 글로벌 성장동력 찾기에 몰두하고자 하는 최 회장의 의지가 반영돼 이뤄진 일로, 다른 의미는 없다"고 일축했다.
이어 "그룹 지배구조 재편 차원에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경영체제 개편 작업의 의미가 최 회장의 최근 주변 환경과 맞물려 자칫 퇴색될 수 있어 우려스럽다"고 토로했다.
이처럼 불거지고 있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가급적 빨리 기업의 지배구조를 김창근 체제로 정립하는 게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사실상 최 회장이 경영 2선으로 후퇴한 마당에 김 의장이 명실상부한 그룹 내 의사결정의 '원톱'으로 빨리 자리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권한이 필요하다"며 "최 회장의 의사결정 참여와 새롭게 도입된 경영체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그룹의 의사결정 구조를 김 의장 체제로 빠르게 정립하고, 이를 어떤 식으로든 대내외에 알리는 것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관련, SK그룹 관계자는 "김 의장의 회장 승진 등 일부 추측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3월 주주총회 이전에는 회장단 인선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SK의 행보가 향후 대한민국 경영사에 새 전기를 마련한 획기적인 경영체제 개편 모델로서 남을 지, 한 그룹 총수의 면피용 촌극으로 회자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SK그룹은 이르면 다음주 중 계열사 CEO 및 임원, 5개 위원회 위원장 인사를 발표할 예정이다. 원래는 글로벌성장위원회, 전략위원회, 인재육성위원회, 윤리경영위원회, 커뮤니케이션위원회, 동반성장위원회 등 6개였으나, 이 중 동반성장위원회가 윤리경영위원회 산하로 편입되는 것으로 정리됐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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