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수백억원대에 달하는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4년의 실형 선고를 받고 법정구속된 최태원 SK(주) 회장의 항소심에서 최 회장 측이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녹음파일에 대해 재판부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녹취 파일에는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인 펀드자금의 선지급 과정에 최 회장이 관여하지 않았다는 내용과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 대표의 단독범행을 입증하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이날 공개된 내용에 재판부가 의구심을 보여 판결에 막판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11일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 문용선) 심리로 열린 항소심 14차 공판에서는 최 회장 측이 탄핵증거로 제출한 김 전 대표와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간의 대화 내용이 담긴 통화내용 2건과 김 전 고문과 최재원 SK수석부회장 간의 통화내용 1건 등 총 3개의 녹음파일이 공개됐다.
녹음파일에는 김 전 대표가 지난해 6월 1심 공판 중 보석으로 풀려난 뒤 같은해 7월 2일 전화통화를 통해 나눈 대화내용이 담겼다.
녹음파일에 따르면 김 전 고문은 김 전 대표에게 '최회장 형제 분들은 모르는일', '최 부회장은 빼라' 등의 언급을 했다. 또 김 전 고문은 최 부회장과의 통화에서 "너는 정말 죄가 없는데 이렇게 돼서 미안하다"며 "너희 형제는 잘못이 없다"고 말했다.
펀드출자 선지급은 자신과 김 전 대표가 꾸민 일이고 최 회장 형제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김 전 고문은 또 김 전 대표에게 "내가 결정적인 자료를 갖고 있으니 대법원에 가면 무조건 무죄를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최 회장 측이 탄핵증거로 제출한 녹취파일이 '약'이 될지 '독'이 될지 모르겠다는 취지의 언급을 했다.
재판부는 "사실관계를 바라보는 재판장과 변호인의 입장은 동일할텐데 왜 (녹취파일을) 제출했는지 모르겠다"며 "(증거로 제출한 녹취파일이) 피고인들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을까"라고 피력했다.
특히 "(녹음파일에는 최 회장 측이)김 전 대표에게 이번 사건의 핵심사안인 베넥스 펀드 출자금 선지급과 송금혐의를 뒤집어쓰게 하려는 정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김 전 대표는 이날 공판에서 지금까지 밝히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을 진술했다.
김 전 대표는 "지난 2008년 5월 21일 김 전 고문의 빌라에서 최 회장과 김 전 고문을 함께 만나 투자금 조성과 관련된 얘기를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어 "2008년 10월 최 회장을 만났을 때부터 (최 회장은 펀드 선지급과) 관련한 모든 사안에 대해 알고 있었다"며 "선지급 기한인 10월 말에 대한 언급도 최 회장이 먼저 꺼냈다"고 덧붙였다.
김 대표의 이날 증언이 사실일 경우, 최 회장은 펀드 조성에 대해 단순히 관여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처음부터 김 전 고문과 주도적으로 공모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재판에서는 최 회장이 송금 사실에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김 전 대표는 또 이 같은 사실을 새로 밝히는 이유에 대해 "최 회장에게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고, 진술 내용이 최 회장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이야기하지 못했다"면서도 "최 수석부회장과 김 전 고문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듣고 모든 혐의를 나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이날 재판부는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이 이번 사건의 배후라는 취지의 언급도 했다. 김 전 고문은 2008년 10~12월 SK텔레콤과 SK C&C 등 계열사들이 베넥스가 만든 펀드에 투자한 자금 중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450억원을 김준홍 전 베넥스 대표로부터 송금받은 인물이다.
김 전 고문은 1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으나 항소심에서 최 회장 등의 변론 방향이 바뀌면서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급부상했다. 최 회장 측은 이 사건의 핵심 쟁점인 펀드자금의 선지급이 김 전 고문과 김 전 대표의 개인적인 거래였을 뿐, 공모에 의한 횡령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주거지를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로 행방이 묘연해 김 전 고문의 법정 증인 출석은 사실상 불발됐다. 앞서 지난 3일 열린 12차 공판에서 최 부회장 측 변호인은 김 전 고문에 대한 증인 신청을 철회한 바 있다.
이날 재판부는 "재계 3위 대기업 회장과 부회장이 김원홍 전 SK해운 고문한테 홀린 것으로 보인다"며 "수천억원을 홀딱 빼앗겼다"고 언급했다.
문용선 재판장은 "뒤에 숨어서 이 사건을 기획·연출한 사람은 김 고문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다음 공판은 16일 오전 10시에 열릴 예정이다. 김 전 고문과 최 회장간의 대화내용이 담긴 녹음파일 공개 여부는 이날에 정하기로 했다.
당초 계획과 달리 재판부는 이어 오는 22일 결심공판을 열고 피고인 신문과 최후변론, 검찰 구형 등 모든 절차를 마치고 항소심 심리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이후 관련 기록 검토를 거쳐 8~9월 중 선고한다는 방침이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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