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기자] 은행 계좌이동제는 네덜란드, 영국, 호주 등 해외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해외의 계좌이동제는 네덜란드가 최초로 도입한 이후 지난 2006년 유럽연합(EU)에서 '국경 간 은행계좌 개설(Open a Bank Account Cross-Border)' 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본격화됐다.
나라마다 금융 환경이 제각각이어서 해외의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도입을 앞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 사례를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호주와 영국의 사례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결과 대체로 시장 전체에서 은행 계좌가 다른 은행으로 넘어가는 현상은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몇 년을 운영했어도 전체 시장 대비 두 자릿수 비율을 넘는 계좌이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존 거래은행에 대한 만족도가 높지 않아도 계좌이동은 극히 적다는 점도 특징이다.
하지만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할 경우 다른 은행 고객을 빼앗아 오는 효과는 분명히 확인됐다. 대개 중소형은행, 인터넷전문은행들이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기존 강자인 대형은행들은 소극적인 모습으로 방어에 머물다가 고객을 뺏긴 경우가 많았다.
◆영국 : 대형은행에서 중소형은행으로 이동
영국은 지난 2009년 유럽연합(EU)의 공동원칙에 근거한 계좌이동제를 도입했다가 2013년 9월부터 업무 표준화 등을 통해 계좌이동제를 보완해 시행중이다.
2009년 도입된 계좌이동 서비스는 은행별 업무 처리절차가 다르고, 사후처리 기준 미비, 소요기간 장기화, 홍보 부족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에 영국의 금융당국(Payment Council)은 2011년 말 업무 표준화, 이체 오류에 대한 보증, 소요기간 축소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좌이동제를 다시 내놓고 2013년 9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개선 이후로는 신규 은행이 13개월 간 지급결제 오류에 대한 보증을 제공하고, 기존에 2~3주 소요되던 이전기간이 7영업일로 단축됐다.
개선된 계좌이동제가 시행됐어도 계좌이동 실적은 극히 미미한 편이다.
하나은행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2013년 9월부터 2015년 3월까지 19개월 동안 영국에서 계좌이동이 일어난 횟수는 약 175만 건. 월 평균으로 계산하면 9만2천여 건(175만/19개월)으로 이는 약 7천600만 개인 영국의 전체 주거래 계좌수의 1.2%에 불과한 수준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거래 계좌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영국의 4대 은행(Lloyds, RBS, Barclays, HSBC)에 대한 만족도가 겨우 50% 수준에 그친다는 점이다. 두 명 중 한 명은 현 거래 은행에 불만이 가득하지만 계좌이동을 하지는 않고 그대로 이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영국의 소비자 단체 등을 중심으로 7영업일의 소요기간도 길다는 지적과 함께 '계좌번호 이동성(Portability)' 제도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도입되지는 못했다.
'계좌번호 이동성 제도'는 이동통신 번호이동제처럼 고객이 동일 계좌번호를 유지하면서 거래 은행을 교체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서비스를 하려면 시스템 투자 비용이 엄청나서 전 세계적으로 도입된 사례는 없다.
영국 금융당국은 계좌이동제 시행에 7억5천만 파운드(약 1조3천억원)가 소요됐으나 계좌번호 이동성 제도를 도입할 경우 시스템 구축 등에 50억 파운드(약 8조6천억원)의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영국에서 전체 계좌이동 비중이 낮긴 하지만, 은행별 계좌이동 양상을 보면 대형은행에서 중소형 은행으로 옮겨간 것을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외신 등에 따르면 계좌이동제에 다소 소극적으로 대응했던 바클레이즈(Barclays), 로이즈(Lloyds) 등 대형은행들은 경쟁사에 고객을 빼앗겼다.
특히 바클레이즈는 2014년 한 해 동안 12만 개 이상의 계좌가 폐쇄돼 다른 은행들보다 타격이 컸던 것으로 분석됐다. 계좌 유입은 3만9천395건이었으나, 12만2천691건이 유출됐다. 로이즈, 냇웨스트(Natwest) 등도 각각 5만개, 7만개 가량의 계좌가 순유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에 산탄데르(Santander), 핼리팩스(Halifax) 등 중소형 은행들은 고금리와 캐시백, 현금 지원 등 고강도의 인센티브를 제공해 고객 유치에 성공했다. 산탄데르와 핼리팩스는 계좌이동을 통해 2014년 한 해 동안 각각 17만551개, 15만6천639개의 새로운 계좌를 순유입시켰다. 이는 2014년에 약 110만건이었던 전체 계좌 이동 중 약 30%를 차지한다.
산탄데르는 예금 잔액에 최고 3% 금리 제공, 이동통신요금, 가스비 등 특정자동이체에 대해 1~3%의 캐시백을 제공하는 등 파격적인 고객서비스를 내세워 성과를 거뒀다. 핼리팩스도 계좌이동 시 일시금으로 125유로를 지급하고 일정금액 이상의 평균잔액을 유지할 경우 매월 5유로를 지급하는 현금 지급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고객을 빼앗겼던 바클레이즈는 올해 4월부터 캐시백 형태의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멤버십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등 서둘러 대응책을 제시한 상태다.
◆호주 : 인터넷은행, 계좌이동을 약진 기회로
호주는 지난 2008년 고객이 직접 처리하는 방식의 계좌이동제를 도입했다가 2012년 7월에 고객 대신 은행이 계좌이동 업무를 처리하도록 개선됐다.
초기 방식은 고객이 기존 거래은행에서 계좌 관련 입출금 정보 리스트를 받아서 새로 거래할 은행에 제출하는 방식으로 계좌를 이동하는 것이어서 불편함이 여전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호주 금융당국은 고객 대신 신규 은행이 계좌이동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는 개선안을 다시 내놓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선된 방식에서는 호주 지급결제협회(APCA)가 운영하는 공동 시스템을 기반으로 은행간 계좌이동 정보를 교류하고, 신규 은행이 자동이체 이전 등을 처리한다. 계좌이동 관련 모든 과정은 약 13~15 영업일이 걸린다.
호주에서는 연간 4~5%의 주거래 계좌가 거래 은행을 교체하는데, 영국보다 3배 정도 높은 수준이다. 이는 주거래 계좌뿐 아니라 모기지론과 저축예금 계좌의 이동도 허용한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2012년 7월을 기점으로 계좌이동이 보다 편리하게 개선되며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하지만 계좌이동 실적은 개선 이전과 이후에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는 수준은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 계좌 대비 계좌이동 비율은 2011년 5.5%에서 2013년 6.6%로 증가했고 연간 계좌 이동 건수도 2012년 85만5천 건에서 2013년 110만 건으로 늘어났다.
호주에서는 온라인으로도 계좌이동을 신청할 수 있는데 온라인에 익숙한 20~30대의 계좌이동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전체 계좌이동에서 온라인 신청 비중은 2012년 15.6%에서 2013년 20.0%로 늘어났다.
호주 소비자단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NAB, 커먼웰스(CommonWealth), ANZ, 웨스트팩(Westpac) 등 호주의 4대 은행에 대한 만족도는 66~69% 수준으로 높지는 않은 상태다. 그러나 향후 12개월 이내 주거래은행 교체 의향은 4.9%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나 계좌이동제가 도입됐지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상황으로 풀이된다.
은행 간 경쟁구도로 보면 도입 초기에 유뱅크(U-Bank), ING다이렉트(ING Direct) 등 인터넷 전문은행은 고금리 제공, 캐시백 및 일회성 현금 지급, 수수료 면제 등으로 적극적인 신규 계좌 유치에 나섰다. 반면 NAB, 커먼웰스(CommonWealth), ANZ, 웨스트팩(Westpac) 등 4대 대형 은행들은 별다른 인센티브 제공 없이 방어하는 모습이었다.
◆계좌이동 규모 작지만, 서비스 향상 기폭제로는 충분
해외 사례를 보면, 계좌이동 규모 자체는 적은 편이지만 도입 후 금융소비자 서비스 개선 면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우리금융경영연구소의 송치훈 책임연구원은 "영국 금융당국은 미미한 계좌이동 실적에도 불구하고 계좌관리 수수료가 인하되는 등의 효과가 있어 소비자 효익 증대 측면의 목표는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계좌이동제 도입 전인 2006년에는 연간 50파운드 이상의 주거래 계좌 관리수수료를 지급하는 고객 비중이 73%에 달했다. 하지만 도입 후인 2011년에는 50파운드 미만의 수수료를 지급하는 고객 비중이 61%로 확대됐다고 한다.
계좌이동제 도입 후 영국에서 고강도 인센티브를 제공한 중소형 은행들이 약진하고, 방심했던 대형은행에서 이탈한 고객들이 늘어난 것과 관련해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서는 "국내 은행들도 영국의 은행 사례를 벤치마킹해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정희수 연구위원은 "호주, 영국 등에서 시행착오를 겪은 점을 고려할 때 계좌이동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금융소비자의 편의성, 신청 절차의 단순성, 시스템의 안정성, 처리기간 및 프로세스의 단축 등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국내의 경우 계좌이동제 도입에 앞서 마련된 '자동이체통합관리시스템'은 보안 관리에 특히 유의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결제원과 은행들이 함께 준비한 이 시스템은 52개 금융회사에 개설된 계좌 전체에 등록된 자동이체 정보를 묶어 일괄 조회할 수 있다. 편리하긴 하나, 만일 해킹 등으로 문제가 생기면 전무후무한 초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다.
이혜경기자 vixe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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